별도의 초대일시가 없습니다.
관람시간 / 10:00am~06:00pm / 주말_10:00am~05:00pm
교화랑_橋畵廊 중국 북경시 조양구 량마교로 40호 21세기호텔 2층 Tel. +82.10.6467.8330 www.korea-chinacenter.com
일상에서 의미 찾기 ● 신희섭, 그의 그림은 우리 일상을 지면에 표현한 하나의 차원이다. 그의 그림 속에 존재하는 도시와 검정비닐 봉지는 나날의 일상생활이며 왜곡된 보도블록과 단조로운 벽은 수시로 경험하는 현재의 어지러움이다. 이처럼 그의 그림은 우리의 일상에 관한 관찰의 형식화이며 재발견이다. 그런데 작가는 일상적인 우리의 경험에서 무엇을 발견하려 하고 있는가? 그것은 아마도 '일상에서 의미 찾기'라는 그의 욕망과 관계되어 있을 것이다.
작가의 지금까지 작업과정을 살펴보면 그의 작업은 관찰의 정밀도를 높이는 방향으로 진행되었다. 작가의 시선은 처음에 도시 전체 풍경에서 시작하여 도시 내부를 관찰하고 다음은 구체적 대상으로 시선이 옮겨 가고 있다. 그리고 결국은 검정비닐 봉지에 이르러서는 '발견'이라고 표현해야 그 의미를 온전히 유지할 수 있을 듯하다. 그런데 발견이라는 말은 관찰자의 감각에 기인한 우연한 사건으로도 해석되어 질 수 있으나, 작가의 경우에 있어서는 대상에 관한 적극적 관찰행위의 결과물에 해당한다. 때문에 작가의 그림 속에 있는 검정비닐 봉지에는 작가의 심리적, 의식적 투사행위가 전제되어 있음을 지적해야겠다.
존재로써 검정비닐 봉지는 두 가지 측면에서 바라 볼 수 있다. 하나는 일상에서 시각이고, 다른 하나는 작가의 욕망에 기인한 시각이다. 먼저 일상에서 검정비닐 봉지는 도시와 제법 잘 어울리는 편리함의 도구이다. 그러나 한 번 그 쓰임이 다하면 다시 그에 적합한 명사가 부여된다. '쓰레기' 이 명사는 특히 검정비닐 봉지가 그 소임을 다하고 건물 모퉁이나 보도블록 위를 배회할 때 위력을 제대로 발휘한다. 이처럼 세상을 보는 일반적인 시각은 대체로 쓰레기를 보는 평범함에 머문다. 존재는 어떠한 관심의 대상도 되지 못하고 또 관계성이 단절된 타자로만 존재한다. ● 하지만 현자들은 시대를 통해 존재의 의미는 도처에 있고 관계 맺지 않은 나는 존재한 것이 아님을 누차 지적했다. 이것은 이렇게 해석되어질 수 있다. '대상으로 존재하는 나와 너는 적극적인 관찰행위에 의해 존재로서 의미가 부여되어질 수 있다.' 그런데 이러한 관점은 작가가 세상을 보는 눈과 닮아 있으며 검정비닐 봉지에 대한 작가의 욕망과도 관계한다. ● 존재에 관한 탁월한 시선을 보여준 모범적 대상이 있는데, 그의 말은 작가의 의식과도 긴밀한 관계가 있는 것 같다. 19세기 시각장애인 여행가 제임스 홀먼은 이렇게 말했다. "절벽 꼭대기에서, 또 푸른 숲의 한 복판에서 ....... 나는 언덕에 부는 바람, 묻힌 나뭇잎들의 엄숙한 정적에 지능이 깃들어 있음을 분명히 인지할 수 있었다. 그런 인식은 나의 가슴 속으로 파고들었고 그러면 울 수밖에 없었다. (제이슨 로버츠 '세계를 더듬다' 중에서)"
작가의 시선은 따뜻하다. 그는 직관이라는 제6감을 이용하여 검정비닐 봉지에 생명을 불어 넣었다. 그리고 검정비닐 봉지에 의미를 부여함으로서 작가와 타자로 존재하는 대상은 관계성을 회복한다. 이제 검정비닐 봉지는 작가 자신이기도 하며 또한 도시와 의미를 주고받는 우리 자신이기도 하다. 작품 속에서 검정비닐 봉지는 세 단계의 변신을 감행하는데, 처음에는 도시의 풍경 속에서 정적으로 존재한다. 이 시기는 작가와 대상이 관계를 맺는 시기이다. 다음에 비닐봉지는 음영(陰影)을 남기며 공간적으로 도약하는데, 이때 음영부분의 도시 풍경은 왜곡된다. 이 시기는 도시와 대상인 검정비닐 봉지가 관계를 맺는 시기이다. 마지막으로 비닐봉지는 궤적(軌跡)을 묵직하게 그리며 흐르는데, 이제야 존재로서 온전한 의미를 부여 받는다. 더 이상 검정비닐 봉지는 작가에게 쓰레기가 아니다. 검정비닐 봉지는 의미를 가진 존재로서 행위 한다. 즉 도시는 검정비닐 봉지를 통해 소통을 향해 나가고, 검정비닐 봉지는 도시에 의해 정체성을 획득해 가는 것이다. 도시는 이제 살아있는 공간이 된다.
누구나 저마다의 세상 보는 방식이 있고, 또 소통하는 형식이 있다. 이렇게 보던 저렇게 보던 상관없다. 특히 그것이 작가라는 자들의 세상 보기라면 말이다. 그들이 본 세상은 소통이라는 문제, 즉 노동의 결과물에 이르러서는 일부의 전문가들을 제외한 대중들에게 그들의 의도대로 읽혀질 가능성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 소통의 형식은 언제나 소비자의 몫이 될 가능성이 많다. 그래서 역설적으로 작가라는 자들은 세상을 정확히 잘 봐야한다는 사명감을 가져야 할 존재들이다. 이런 점에서 작가 신희섭의 검정비닐 봉지를 보는 예사롭지 않은 눈을 인정해 주고 싶다. ● 한편 검정비닐 봉지가 변신해 가는 일련의 과정은 작가 자신의 변신 과정이기도 한데, 작품이 견고해 졌다는 의미기도 하고, 작가의 세상 보기가 견고해 졌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미래의 시간에 작품이든 세상보기든 더 견고해지기를 기대한다. ■ 박수철
Vol.20080630f | 신희섭展 / SHINHEESEOP / 申憙燮 / painting